韓國-韓民族 自尊
탈북 국군포로 6개월째 송환 못해 / 84세 탈북 국군포로가 南으로 보낸 ‘추석 편지’ / 탈북 국군포로, 제3국 한국영사관서 보호 중 / 84세 탈북 국군포로 '대한민국에 보내는 편지' - North Korean POWs not repatriated 6 months / 84 years 南 sent to the North Korean POWs 'holiday letter' / North Korean POWs, Kansai Chapter 04 pr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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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2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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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국군포로 6개월째 송환 못해 - YTN | ||||
입력시각 : 2010-09-25 05:44 | ||||
[앵커멘트] 6.25 전쟁 당시 북한에 끌려간 국군포로가 고국에 돌아오고 싶어서 84살의 나이에 목숨을 걸고 탈북했습니다. 하지만, 제 3국에 있는 우리 공관에서 6개월째 거의 갇힌 상태로 국내에는 송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사연인지, 이동우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탈북한 국군포로 84살 김 모 씨가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에게 쓴 편지입니다. 24살 육군 이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북한에 끌려간 이후 60년, 가족을 그리워하며 산 세월을 힘겹게 풀어냈습니다. [인터뷰: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 "군대에 갔다가 이렇게 부상당하고 포로가 됐는데 나를 어떻게 60년 동안 버릴 수가 있느냐고..." 정전 협정 당시 북한이 국군포로의 존재를 모른다면서 자신들을 골짜기에 숨겼던 내용과 이후 반신 불수의 몸으로 노역을 하며 살아온 내용도 담겨있습니다. 김 씨는 2년 전 한차례 탈북에 실패했다가 올해 4월 북에 사망신고를 하고 어렵게 탈북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제 3국에 있는 우리 공관 지하실에서 지내며 6개월 가까이 송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군포로로 확인이 됐는데도, 우리나라가 해당 국가로부터 출국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 "인도주의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국제법적인 면에서 볼 때라도 이건 문제가 매우 심각한 거예요. 대한민국의 외교력이 이 정도밖에 안되는지..." 김 씨가 죽은 줄로만 알고 남의 유골로 제사만 지내오던 김씨의 누나와 남동생은 우리나라에서 어느새 나이 여든을 훌쩍 넘겼습니다. [인터뷰:김 씨 남동생] "유골까지 왔어요. 유골이 와서 동네에서 장사를 지냈어요. 누님이 90이세요. 90이신데 걱정하시잖아요, 못 보나보다, 못 보나보다고..." 참혹하게 헤어진 이산가족이 안락한 가정을 이루도록, 자신의 사연을 간곡하게 사정하는 김 씨에게 국가는 아무런 답변도 해주지 못한 채 기약없는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YTN 이동우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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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국군포로, 제3국 한국영사관서 보호 중 - mbn | ||||
2010.09.25 01:27 | ||||
지난 4월에 탈북한 80대의 국군포로가 제3국의 한국영사관에 머무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은 지난 4월 6일 탈북해 7월부터 제3국 한국영사관의 보호를 받는 국군포로 김 모 씨를 직접 만나고 돌아왔다고 밝혔습니다. 박 의원은 김 씨가 우리 국회에 보내는 20장 분량의 편지와 국방부 장관에게 보내는 탄원서에서 조속한 귀환 조치를 요청하는 한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적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현지 당국과의 외교 문제로 김 씨의 귀환 조치가 늦어지는 것에 대해 국군포로 송환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유엔을 통해 당당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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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세 탈북 국군포로가 南으로 보낸 ‘추석 편지’ - 동아 | ||||
2010-09-25 03:00 2010-09-25 12:45 | ||||
3월 탈북후 3국서 발묶여… 박선영 의원에 21쪽 편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꿈속에서나 생시나 흐느껴 울며 그리워해 온 내 고향산천…. 24세에 생이별하고 고향을 떠나 6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생이별은 참으로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애끓는 눈물 젖은 세월이었습니다.”
올 3월 탈북해 제3국의 한 재외공관에 머물고 있는 국군포로 A 씨(84)에게 이번 추석은 잔인한 명절이었다. 60년간 오매불망 그리던 남녘의 고향땅을 밟기 위해 북한의 가족과 생이별하고 목숨을 건 탈북을 감행했지만 정부 간 협상이 늦어지면서 제3국에서 7개월째 발이 묶여 홀로 추석을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고혈압과 왼쪽 팔다리 마비로 자리에 누운 채 기약 없는 귀환을 기다리고만 있는 A 씨는 18, 19일 공관을 찾은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에게 “제발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볼 수 있게 해달라”며 눈물을 쏟으면서 고국의 동포들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건넸다.
24일 동아일보가 전달받은 편지는 “60년 세월 고향 그리움, 내 말로 어찌 표현하겠는가. 내 후대들이 다시는 나와 같은 참극을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눈물겨운 60년을 회고한다”로 시작된다. 무려 21쪽에 걸쳐 촘촘하게 써내려간 편지에는 화목한 집안의 귀염둥이로 자라나 국군포로로, 그리고 이제는 탈북자 신세가 돼 홀로 낯선 외국 땅에서 고향을 그리는 한 많은 일생이 구절구절 배어 있다.
“유교를 교리로 화목하게 사는 집안에서 그야말로 문중의 귀염둥이로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큰집 작은집 형수님들이 ‘도련님 귀엽다’며 손등을 쓰다듬는 등 어린 시절에 귀여움에 맛들려 살던 추억이 목이 메어 더욱 고향을 그리워하며 60년을 살았습니다.” 1927년 경기 광주에서 태어난 A 씨는 1950년 4월 윤모 씨(당시 21세)와 결혼했다. 하지만 곧 6·25전쟁이 터졌고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국군 3군단 3사단 18연대 2대대 6중대 소속으로 1951년 5월 강원 인제군 가리봉(설악산 소재·해발 1519m) 방어전투에 투입됐다.
“5월 18일 밤 12시경 적에 공격을 전초에서 방어하다 적탄에 머리에 심한 부상을 당해 당시 민간인들로 구성된 부상병 운반대 들것에 실려 오던 도중 심한 아픔으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A 씨가 숨진 것으로 여긴 민간인들은 신분증만 챙긴 채 그를 버리고 갔다. 그는 이튿날 인민군에 발견돼 평양 인민군 중앙병원에 후송됐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중립국감독위원회가 포로 귀환을 위해 각 부대를 순회 조사하러 나왔다. 그러나 실제론 대부분의 국군포로들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A 씨는 증언했다.
“모든 포로병들이 (평안남도) 양덕, 맹산의 골짜기로 끌려가 은폐되어 있다가 일이 완화되자 전원 (평양) 순안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어 일하다, 머리 부상으로 인한 심장신경발작이 일어….”
1954년 황해남도에 정착한 A 씨는 28세 때 다시 결혼했다. 남쪽의 처가 살아 있는지, 아이를 낳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살아야 했다. 하지만 ‘국군포로’란 전력은 끊이지 않고 그와 그의 가족을 괴롭혔다.
▼ 병석에 누운 채 한국 올 날만 기다려 ▼
“1962년부터 농촌건설대에서 일했는데 성분이 좋지 않은 사람을 뽑아 쏘련 벌목공으로 보내는 데 뽑히었는데 머리 부상으로 반신불수라 하여 신체검사에서 떨어졌습니다.”
“맏딸이 인물이 뛰어나게 곱고 생활고등교육을 받아 타에 모범적이어서 보는 사람마다 탐내던 중, 군 안전부 과장이 자기 동생을 추천하며 량편(양편) 합의가 이뤄질 무렵, 과장이 아버지가 의용군 출신이 맞는지 확인하자고 안전부 문건을 뒤져보니 포로병이라, 혼사를 흐지부지 취소하였고, 나는 반감이 일었으나 속수무책 쓴침을 마시었습니다.”
명절이나 생일 때마다 고향을 그리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러던 중 2008년 중국과 북한의 접경 지역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남동생, 여동생과 재회하게 됐다. 부모와 맏형은 작고하고 큰누나(현재 90세)가 고향에 살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가족들이 1951년 당시 그가 전사했다는 통지서를 받고 그가 숨졌다는 가리봉을 찾아 유골(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유골)을 수습해 묘를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막힌 사연도 듣게 됐다.
올 3월 84세 생일날. 인민학교(우리의 초등학교에 해당) 4학년인 손자의 ‘계몽가요’(A 씨의 표현)는 그를 다시금 울렸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로 시작되는 노래에 그는 “저절로 고향생각에 복바쳐(복받쳐)”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 아들 며느리 딸 등 온 가족이 “고향에 보내드리는 게 가장 큰 효도인 것 같다”며 함께 울었다. 자식들은 곧 ‘결심’을 실행에 옮겼고 A 씨는 탈북 브로커의 등에 업혀 압록강을 건넜다.
“연락원의 말에 따르면 일주일, 늦어도 한 달이면 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여 믿으며 떠났습니다…. 그런데 (한국) 영사관에 와보니 현실은 딴판이었습니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북한에 억류돼 있을 것으로 추정한 국군포로는 8만2000여 명. 그러나 당시 송환된 국군포로는 8343명으로 10분의 1가량에 불과했다. 지금까지 탈북해 조국으로 생환한 국군포로도 79명에 불과하다. 박선영 의원은 “국군포로는 6·25전쟁 참전용사인 만큼 국민의 인권 차원에서 다뤄야 할 사안”이라며 “우리 정부도 ‘조용한 물밑 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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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 만에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 A(84)씨가 최근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에게 전달한 편지와 사진. 왼쪽 사진은 70대 시절 찍은 증명사진이고, 오른쪽은 탈북해서 찍은 사진이다. A씨는 지난 4월 탈북해 제3국의 우리 공관에서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 ||||
84세 탈북 국군포로 '대한민국에 보내는 편지' - 조선 | ||||
안용현 기자 ahnyh@chosun.com 입력 : 2010.09.25 02:59 | ||||
"지난 60년은 상상도 못할 눈물의 세월… 가족과 만남 기대했지만 계속 속아…
전쟁 나면 권력자 자식들부터 참전을" "24세에 고향을 생이별하고 떠나 60년 세월이 지난 84살에서야 고향을 찾게 됐다. (북에서의 60년은)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애끊는 눈물의 세월이었다."
60년 만에 북한을 탈출해 제3국에서 귀국을 기다리는 국군포로 A(84)씨가 최근 현지 공관을 방문한 자유선진당 박선영 의원을 통해 20장짜리 편지를 보냈다. 지난 4월 탈북해 5개월째 제3국의 우리 공관에 체류 중인 A씨는 박 의원에게 이 편지를 우리 국민들에게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제3국의 비협조로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24일 공개된 편지에 따르면 A씨는 "7·4 공동성명(1972년)이 나오고 적십자회담, 총리회담을 할 때마다 행여나 (남한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하며 기대를 걸었지만 모두 속았다. 편지 거래라도 허용해 불쌍한 이산가족들의 소원을 풀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썼다. 현재 남한에는 A씨의 일부 가족들이 생존해 있다. 특히 그는 "무슨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 같은 것을 차려놓고 주민들을 기만하고 있다"며 "(북한에선) 권위 있는 자 몇 명만 (금강산에서) 면회하는 형편"이라고 밝혔다.
6·25 참전용사인 A씨는 "만약 다시 전쟁이 나면 대통령·국회의원·장관 등 권력자의 자식들이 먼저 참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25 때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아들이 중공군으로 참전해 전사했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사령관의 아들 2명이 러시아 고지를 뺏으려다 전사한 사례를 들었다.
그는 "나는 1950년 국군에 입대해 1951년 초 강원도 인제·양구에 주둔하던 3군단 3사단 18연대 2대대 6중대에 배치, 그해 5월 18일 가리봉 방어전투에 참전했다가 머리에 적탄(敵彈)을 맞았다"고 밝혔다. 국군은 심한 총상을 입고 기절한 A씨가 죽은 줄 알고 그의 군번줄을 떼어낸 뒤 가족들에게 전사통지서를 보냈다. 그러나 숨이 붙어 있던 A씨는 북한군에 발견돼 치료를 받았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평양의 39호 병원에 있었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중립국감독위원회가 북한군 부대를 돌며 국군포로들을 찾아 나서자 북한군은 A씨를 다른 포로병들과 함께 평남 양덕군의 맹산 골짜기에 숨겼다고 한다. 이후 A씨는 "평양 순안비행장 건설에 동원돼 일하다가 1962년 한 농촌건설대에 배치됐지만 (부상 후유증으로) 반신불수 처지라 제대로 일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선영 의원은 "현재 A씨 건강이 좋지 못하다"며 "하루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관계 당국이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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